유부남인 甲男이 이혼녀인 乙女를 상대로 차용금 1000만원의 반환을 청구한 사건이 있었다. 甲男이 결정적인 증거라며 제출한 갑1호증에는, 각서라는 제목과 함께 ‘절대 잊지 않고 꼭 갚겠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희한하게도 각서 말미 서명 옆에는 도장이나 지장 대신에 빨간 립스틱의 입술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사정은 이렇다. 동호회에서 만나 정분이 난 甲男과 乙女는 부적절한 관계를 이어왔다. 어느 날 乙이 시름에 잠겨있어 자초지종을 물으니 급히 1000만원이 필요한데 도저히 마련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甲은 호기 있게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며 1000만원을 마련하여 건네주었다. 대부분의 불륜이 이르는 결말처럼 이들도 얼마 후 파탄을 맞게 된다. 甲은 빌려준 돈이니 돌려달라고 청구한다. 乙은 대가 없이 준 돈을 반환하라니 어이가 없다는 입장이다. 쟁점은 간단했다. 차용금이냐 증여금이냐….

甲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자신은 1000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증여할 만큼 넉넉하지 못해, 친한 친구로부터 갑1호증을 맡기면서 이자를 주고 차용하여 다시 乙에게 빌려준 것이란다. 그 친구도 증인으로 나와, 변제를 독촉하니 ‘乙로부터 변제를 받으면 바로 갚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乙의 주장도 말이 된다. 빌려준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또 서로 만날 때 지출한 소위 불륜의 비용을 평소에는 甲이 전적으로 부담해 왔는데 이 돈을 받은 후에는 대부분 乙이 부담했단다. 갚아야할 돈이었다면 빠듯하게 생활하던 乙이 부담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립스틱 각서에서도 상반된다. 甲의 주장은 乙이 ‘은인에게 어떻게 하찮은 손가락 지장을 찍어 줄 수 있겠느냐’며 꼭 갚겠다는 맹세로 입술을 찍어 주었단다. 乙은, 甲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적었고 장난삼아 립스틱을 묻힌 입술을 찍은 것일 뿐 변제하겠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저기 의견도 구해보고 수회 속행을 거듭한 끝에 어렵사리 내린 결론은 ‘甲은 빌려 주었고, 乙은 무상으로 증여 받았다’였다. 둘 다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봤다. 다만 당시 사정상 서로의 의사를 확인하지 못해 서로 오해했을 것이다. 계속된 조정절차에서 서로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다고 악을 쓰며 감정싸움을 하다가 결국 적절한 선에서 제시한 강제조정을 받아들여 종결되었다.

찾기도 쉽지 않은 진실이 어떤 때에는 하나만이 아닌 경우도 있는 것 같다. 판관의 신중함과 현명함이 필요한 대목이다. "재판, 하면 할수록 참 어렵다"던 선배님들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